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수빈 박씨 (문단 편집) === 후궁 시절 === [[1787년]](정조 11) 2월 11일, 18세의 박씨가 후궁이 되었을 때는 정조가 36세였다. 당시 기준에서 중년에 접어든 나이였다. 안그래도 늦게 얻은 장남인 문효세자가 만 3세를 일기로 홍역으로 요절한 상태에서 그 생모인 의빈 성씨마저 임신 중에 사망한지라 후계자가 급한 때였다. 그래서 박씨를 후궁으로 책봉하는 교명문에서 나라의 형세가 외롭고 약한 날을 맞아 [[정순왕후(조선 영조)|정순왕후]]가 친히 가려서 후궁이 되게 하였으니 자손을 많이 두라고 하였다. 수빈 박씨의 처소는 [[창경궁 집복헌]]으로 [[숙종(조선)|숙종]]의 후궁 [[명빈 박씨]]가 [[연령군]]을 낳은 곳이자, [[영조]]의 후궁 [[영빈 이씨]]가 [[사도세자]]를 낳은 곳이다. 영빈이 줄줄이 딸만 낳자[* [[영빈 이씨]]는 아들 [[사도세자]]를 낳기 전까지 5녀를 낳았고, 사도세자를 낳은 후에 [[화완옹주]]를 낳아서 총 1남 6녀를 낳았다.], [[인원왕후]]가 "집복헌으로 처소를 옮기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"며 처소를 옮기라는 명령을 내렸고 영빈이 처소를 옮긴 후 고명아들 사도세자를 낳았다고 한다. 수빈의 처소를 집복헌으로 한 것은 집복헌에서 영빈이 아들을 낳았듯, 대를 잇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. 입궁하고 첫 아이인 [[순조|원자]]를 낳기까지 4년이라는 꽤 긴 시간이 걸렸는데, 여기에는 수빈 박씨가 입궁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[[효의왕후]]가 임신을 한 것도 한 원인이 됐다. 왕비가 임신을 했으니 이는 나라의 경사였지만 이대로라면 수빈 박씨는 존재감 없는 후궁이 될 위기였다. 그러나 모두의 기다림에도 불구하고 효의왕후의 임신은 [[상상임신]]으로 드러나 1788년 12월 30일 산실청이 철수된다. 이후 수빈 박씨는 8~9달 뒤인 약 9월경에 임신하여 다음해 1790년 음력 6월 18일 [[순조|원자]]를 낳았다. >又聞: 朴嬪旣有娠, 而上以前兩度虛胎爲懲, 不以頒告. 外朝有以微稟者, 上微哂曰: "姑勿明言可也." >또 이런 일을 들었다. 박빈(유빈 박씨)이 이미 임신하였는데, 상(정조)께서 이전 두 번의 허태(虛胎) 때문에 조심하여 (임신 사실을) 반포하지 않으셨다. 외조(왕이 국정을 듣는 곳)에서 이를 가지고 넌지시 여쭌 자가 있었는데, 상께서 은미하게 웃으며 이르시기를, “우선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것이 옳다.” > >---- >황윤석, 《이재난고》 45권 1790년(정조 14년, 경술년) 음력 4월 7일 일진 : 정사(丁巳) (庚戌四月七日 丁巳) [[http://yoksa.aks.ac.kr/jsp/aa/VolView.jsp?aa10no=kh2_je_a_vsu_55001_045&aa15no=045&aa20no=55001_045_0097|#]] 원자(순조)를 낳은 후에도 왕비인 효의왕후를 신중히 섬기고 같은 반열을 더욱 온화하게 대하니, 궁중에서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. 정조와 부부로 지내던 14년 동안 1남 1녀를 두었다.[* 기록에 남은 정조의 자녀들 중 장성해서 혼인해 후사까지 둔 자녀들은 다 수빈 박씨 소생이다.] 어질고 온화한 성품에 검소한 생활을 하여 정조는 그녀를 어진 빈[賢嬪]이라 부르며 총애했고,[* [[한중록]]에 따르면 정조는 박씨를 중하게 여겼다고 하며 고종실록에 따르면 다른 후궁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높은 총애를 받았다고 한다.] 집복헌과 가깝게 위치한 [[창경궁 영춘헌|영춘헌]]에 머물렀다.[* 정조는 치세 전반기를 [[창덕궁]]에 머물렀다가 1789년 9월에 [[창경궁 영춘헌|영춘헌]]이 있는 [[창경궁]]으로 옮겼다. 참고로 정조는 영춘헌에서 붕어했다.] 그리고 그녀의 친정에도 손편지로 안부 인사를 드렸는데 주요 수신자는 수빈의 큰아버지이자 당대 유학자인 박윤원과 수빈의 아버지 박준원, 큰오빠인 박종보 등이었다. 1790년에 순조를 낳고, 1793년에 [[숙선옹주]]를 낳았다. 숙선옹주를 출산했을 당시에 만 23세였기에 왕실에서는 수빈 박씨가 더 많은 자녀를 두어 종사를 번창하게 하길 원했다. 그러나 그 뒤로 정조가 서거할 때까지 7년 동안 다시 임신하지 못했는데 아마도 이는 수빈 박씨보다는 정조의 문제로 보인다. 정조는 만 48세를 일기로 서거하기 몇 년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못했다. 줄곧 머리에 난 부스럼 때문에 속이 답답하고, 때로는 밤잠을 설치며 두통을 앓는 등 잦은 병치레를 했다고 한다. 더구나 과중한 업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과음으로 풀었다고 하니 40대에 이미 건강이 많이 상했을 것이다. 30대 때에도 동년배 신하들에 비해 백발인 데다가 치아도 여러 개가 빠져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모습이었기에 이걸 갖고 자조하기도 했다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